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게르만족의 대이동 (문단 편집) == 대이동 이전 == || [[파일:북유럽 청동기 시대 사회.png|width=100%]] || || 청동기 시대의 게르만족 || ||<-2> [[파일:1280px-Germanic_tribes_settlements_750BC-1AD.svg.png|width=100%]] || ||<-2> 고대 게르만족의 이동 || ||<#FF0000>||기원전 750년 이전 || ||<#FF9955>||기원전 750년과 기원후 1년 사이 || ||<#FFEEAA>||기원후 100년까지 || ||<#99FF55>||기원후 100년 이후 || 독일 지역이 이들의 주 영역이었다는 인식이 있으나, 실제 게르만족은 전부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내려왔다. 게르만족의 조상들은 스칸디나비아의 원주민들과 [[통혼]] [[혼혈]]하였는데 여기서 게르만족의 주된 [[금발벽안]]의 혈통 형질을 받았다. 기원전 700년 이전 게르만족은 스칸디나비아 남안과 [[유틀란드 반도]]에서만 거주하고 있었다. 기원전 600년~300년 사이 스칸디나비아의 온도가 내려가자 게르만족은 대거 [[발트해]]를 남하하여 발트해 남안에 거주하게 되었고 이후 남하를 계속하여 [[켈트족]]을 몰아내고 [[중부유럽]]을 차지하여 정주하게 된다. 기원전 120년 유틀란드 반도에 대기근이 닥치자 이곳에 거주하고 있던 게르만족의 일파인 킴브리족과 테우토니족(튜튼족) 등이 살 곳을 찾아 남하하다가 로마와 맞닥뜨리게 된다. 로마는 이들이 이탈리아로 침공할 것을 우려하여 수차례 군대를 보냈으나 전멸하고 [[집정관]]이 연이어 전사하고 말았다. 이에 큰 위협을 느낀 로마는 기원전 105년 무려 12개 군단을 동원하는 총력전을 펼쳤으나 [[아라우시오 전투]]에서 8만 명이 전사하는 로마 역사상 전무후무한 최악의 참패를 당하게 된다.[* 다만 국내에서는 아라우시오 전투의 내용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유는 고대 로마사를 다룬 베스트셀러인 [[로마인 이야기]]에서 아라우시오 전투에 대해 철저히 침묵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로마인 이야기가 출간되기 전의 국내에서는 로마사나 게르만족 역사를 비롯한 고대 서양사에 대한 지식 자체가 거의 전무하다시피한 실정이었다.] 이에 로마 시민들은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고, 국가적 위기를 맞은 로마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지도하에 로마의 사회 체제를 뒤엎는 군제 개혁을 실시했다. 그런데 킴브리족과 테우토니족은 곧장 이탈리아로 진격하지 않고 [[이베리아 반도]]와 [[갈리아]]를 유랑하면서 선주민들과 전투를 치르며 전력을 소모하다가 급기야는 분열되고 말았다.[* 왜 이들이 [[이탈리아]]로 진격하지 않았느냐면, 그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진짜 목적은 [[로마 공화국|로마]]에 대한 정복과 약탈이 목적이 아니라, 한 곳에서의 정착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절대다수의 게르만족은 [[유목|유목민]]이 아니라 농경민이었고, 따라서 유랑 생활을 오래 지속하는 것이 불가능했기에, 선주민과의 무력 충돌이 있거나 말거나 정착지를 찾고자 노력했다. 이런 상황에서 불필요한 전쟁은 부담되는 일이었다. [[동북아시아]]의 사례이지만 [[청나라]]의 [[만주족]]도 고대 게르만족과 비슷하게 농경민 성향이 어느 정도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중원 정복 또한 어찌보면 [[만주|기존의 척박한 정착지]]를 떠나 [[중국|기름진 새 정착지]]를 얻으려는 것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한편 로마군은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으로 직업군인화되어 강도 높은 훈련을 받고 있었다. 분열된 게르만족이 각각 다른 방향으로 이탈리아로 접근해 오자 로마군은 기원전 102년 마르세유 인근에서 테우토니족을 격퇴했고, 이어 기원전 101년 알프스 산맥을 넘어오느라 약화된 킴브리족을 밀라노 인근에서 섬멸했다. 킴브리족과 테우토니족은 전멸했고 여자들과 어린이는 자결하여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이때 군제 개혁으로 로마군은 용병화되어 로마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이행하는 중요한 한 원인이 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킴브리 전쟁]] 참조. ||<-2> [[파일:Germanic_dialects_ca._AD_1.png|width=100%]] || ||<-2> 기원후 1년경 게르만어의 분포 || ||<#009FE3>||[[북게르만어군|북게르만어]] || ||<#FF6E69>||북해 게르만어 || ||<#F7B859>||저지 프랑크어 || ||<#FFFF59>||고지 독일어 || ||<#009640>||[[동게르만어군|동게르만어]] ||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을 치르면서 게르만족과 싸웠고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만족과의 경계를 [[라인 강]]에서 [[엘베 강]]으로 확장하기 위해 11개 군단을 투입하여 10여 년에 걸친 대규모 [[게르마니아]] 정복 사업을 펼친다. 그러나 서기 9년에 [[아르미니우스]]가 이끄는 게르만족 연합이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로마군을 전멸시키는 대승을 거두면서 로마 제국은 게르마니아 정복을 포기하게 되고 로마와 게르만족의 국경은 [[라인 강]]과 [[도나우 강]]으로 확정된다. [[토이토부르크 전투]] 이후에도 게르만족과 로마는 라인 강과 도나우 강에 이르는 넓은 지대를 국경으로 마주하면서 수시로 크고 작은 전투가 이어진다. 3세기에는 게르만족의 한 부류인 [[고트족]], [[프랑크족]], [[알레마니|알레마니족]][* 알레마니족은 [[프랑스어]]에서 독일을 칭하는 알마뉴의 어원이 되었다.]이 로마를 공격하여 로마에게 타격을 주기도 했다. 동시에 게르만족과 로마 사이에 조심스러운 교류가 진행되기 시작되어 게르만족은 로마 사회로 조심스럽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게르만족의 범위는 굉장히 넓었고 그 속에 많은 부족들이 있었으므로 로마는 일부 게르만족과는 대립각을 세우는 한편 다른 일부 게르만족과는 동맹을 맺는 식의 정책을 쓰며 게르만족을 다루었다. 이 시기 게르만족에 대해 다룬 책으로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와 [[타키투스|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의 《[[게르만족의 기원과 위치|게르마니아]]》가 있다. 갈리아 전기에 따르면 재미있는 게르만의 풍습이 하나 나오는데, '''전사의 키와 힘이 [[동정]]을 유지하는 기간에 비례해서 커진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일찍 잃는 것을 수치스러워하기도 했고, 성경험이 늦을수록 자랑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진지하게 부연하자면, [[성조숙증|유전이나 섭식상의 이유로 2차 성징이 빨리 나오면]] 성장판이 일찍 닫히는 경향이 있기는 하다. 그리고 동정을 지키는 것 내지 성관계를 하지 않는 것과 힘 또는 집단이 높이 평가하는 성질을 습득하는 것이 관계 있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통해 찾기 어렵지 않다.] 그들 사이에서는 '''[[마법사#s-6.2|가장 오래 동정을 지킨 자가 가장 큰 칭찬을 받았다]]'''(...). ~~[[토이토부르크 전투|토이토부르크]] 승리의 비결~~ --대마법사, 대현자-- 이런 풍습은 [[켈트족]]에게도 있어서 동정인 사람을 우대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